2009년 11월 1일 일요일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예수님을 믿는 것인가?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예수님을 믿는 것인가? 이것을 즉각 대답할 수 없다면 당신은 성경을 읽어야 한다.
첫째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1)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2)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3)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4)라, 모사(*5)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사야 9:1-7)
이 말씀은 이사야서의 말씀이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오래 전에 쓰여진 예수님에 대한 예언서이다. 예수님은 해변길과 갈릴리(*2)에서 많은 사역을 행하셨다. 그래서 갈릴리 예수님이라고도 부르지 않는가? 스블론과 납달리 땅(*1)은 갈릴리를 가르키는 말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여 영화롭게 된 것,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비춰져서 무거운 멍애와 어깨의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가 꺽어지는 것이며, 피묻은 겉옷이 불에 살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 이 모든 것을 위해 태어난 아기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3 옛날말로 표현된 정사 - 정부의 일)를 어깨에 메었고, 그의 이름은 wonderful(*4 놀랍다는 뜻의 옛날말 기묘자 - 신비한 사람, 영어성경으로는 Wonderful)이며, 모사(*5 Counsellor 즉 우리를 상담해줄 수 있는 사람 - 자신이 인간의 고난을 직접 겪음으로 인간의 고난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인 것이다.
다시 번역하면 예수님은 원더풀하신 분이며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상담해주시는 우리를 이해하시는 분인 것이다.
2. 하나님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하셨다.
죄인은 하나님에게 직접 나아갈 수 없다. 전기가 필요한 사람이 전기를 구하려고 거대한 화력발전소의 불길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전기는 물론 발전소의 거대한 불에서 나올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 앞에 서면 타서 없어진다. 죄인은 하나님앞에 직접 나아가면 그의 거룩하심을 충족시킬 수 없는 죄의 덩어리이기 때문에 소멸되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의 육체로 그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아오라 했다. 예수님이라는 죄없는 양의 죽음을 통해 얻어진 가죽옷(창 3:21)을 입고 나오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시키시면 시킨데로 하는 것이 순종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에게로 나오라고 했다. 자기가 율법의 요구를 지켜, 착하게 살아서 하나님께 나오라고 하지 않았다.
왜 이 명확한 복음을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또 알고도 늘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뜻대로 구원받으려고 하는가?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믿고 구원받으라고 했다. 새벽 기도, 주일 헌금, 교회 봉사를 통해 구원받는 다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를 믿고 그의 임재하심이 들어오면 교회의 여러가지 것들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그러나 그 순서는 굉장히 중요하다.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 귀한 것을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과, 그 반대로 예수님을 모르지만 교회에서의 주어진 역할과 다른 사람의 기대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 두 가지는 똑 같아 보이지만 하나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리는 제사 창4:4)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제사(땅의 소산으로 드리는 제사 창 4:5)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마치 전기 콘센트와도 같이 작고 초라한 우리의 허영심이 기대하는 화려한 모습의 그 어떤 것이 아닌 그 예수 그리스도에 우리의 플러그를 꽂을 때 전기는 우리를 태어죽이는 무서운 율법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추울 때 우리를 얼어죽지 않게 해주고 인생의 더위로 나가 떨어지지 않게 해주시는 "작동하는 전기", 즉 성령님으로 임하시는 것이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서 53:2-3)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1)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2)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3)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4)라, 모사(*5)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사야 9:1-7)
이 말씀은 이사야서의 말씀이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오래 전에 쓰여진 예수님에 대한 예언서이다. 예수님은 해변길과 갈릴리(*2)에서 많은 사역을 행하셨다. 그래서 갈릴리 예수님이라고도 부르지 않는가? 스블론과 납달리 땅(*1)은 갈릴리를 가르키는 말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여 영화롭게 된 것,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비춰져서 무거운 멍애와 어깨의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가 꺽어지는 것이며, 피묻은 겉옷이 불에 살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 이 모든 것을 위해 태어난 아기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3 옛날말로 표현된 정사 - 정부의 일)를 어깨에 메었고, 그의 이름은 wonderful(*4 놀랍다는 뜻의 옛날말 기묘자 - 신비한 사람, 영어성경으로는 Wonderful)이며, 모사(*5 Counsellor 즉 우리를 상담해줄 수 있는 사람 - 자신이 인간의 고난을 직접 겪음으로 인간의 고난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인 것이다.
다시 번역하면 예수님은 원더풀하신 분이며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상담해주시는 우리를 이해하시는 분인 것이다.
2. 하나님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하셨다.
죄인은 하나님에게 직접 나아갈 수 없다. 전기가 필요한 사람이 전기를 구하려고 거대한 화력발전소의 불길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전기는 물론 발전소의 거대한 불에서 나올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 앞에 서면 타서 없어진다. 죄인은 하나님앞에 직접 나아가면 그의 거룩하심을 충족시킬 수 없는 죄의 덩어리이기 때문에 소멸되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의 육체로 그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아오라 했다. 예수님이라는 죄없는 양의 죽음을 통해 얻어진 가죽옷(창 3:21)을 입고 나오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시키시면 시킨데로 하는 것이 순종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에게로 나오라고 했다. 자기가 율법의 요구를 지켜, 착하게 살아서 하나님께 나오라고 하지 않았다.
왜 이 명확한 복음을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또 알고도 늘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뜻대로 구원받으려고 하는가?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믿고 구원받으라고 했다. 새벽 기도, 주일 헌금, 교회 봉사를 통해 구원받는 다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를 믿고 그의 임재하심이 들어오면 교회의 여러가지 것들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그러나 그 순서는 굉장히 중요하다.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 귀한 것을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과, 그 반대로 예수님을 모르지만 교회에서의 주어진 역할과 다른 사람의 기대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 두 가지는 똑 같아 보이지만 하나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리는 제사 창4:4)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제사(땅의 소산으로 드리는 제사 창 4:5)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마치 전기 콘센트와도 같이 작고 초라한 우리의 허영심이 기대하는 화려한 모습의 그 어떤 것이 아닌 그 예수 그리스도에 우리의 플러그를 꽂을 때 전기는 우리를 태어죽이는 무서운 율법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추울 때 우리를 얼어죽지 않게 해주고 인생의 더위로 나가 떨어지지 않게 해주시는 "작동하는 전기", 즉 성령님으로 임하시는 것이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서 53:2-3)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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