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22일 금요일

교회부흥의 확실한 방법

저에게는 다음의 세가지가 성경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읽고 묵상한 사람이라면 너무나 당연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경영학적 이론을 교회에 도입하려고 하시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왜 그럴까도 생각해 봅니다. 저도 어떻게 하면 장사를 잘 할 수 있을까 혹은 돈을 벌수 있나에 대해 생각해 볼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경영학적 방법론이 주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을 대상으로, 또 이윤추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교회는 하나님과 그의 구원 계획이 그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1. 모든 일을 제쳐놓고 전도한다.

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자신의 능력의 한계가 주어져 있습니다. 어떤 특별한 사람은 평범한 사람과 많이 다르다는 사실도 또한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특별한 사람도 그 한계가 있고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먼지와도 같아서 긍휼하게 여기십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 시편 103: 10-14

* 참고로 위의 성경 구절은 하나님이 "구약"성경에서 그처럼 많이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피흘리심으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고 그 영광에 참예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우리가 죄인(우리의 체질)임을 아시고 하나님과 영원히 떨어지는 지옥 갈 운명(단지 먼지뿐)을 아시고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 멀리 옯기셨으며(예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의롭다(우리에게 그대로 갚지 아니하셨으니)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는 한계가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안에는 해야할 일의 종류가 무수히 많습니다. 각각의 일들이 모두 없어서는 안될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각각이 그 중요한 정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밥은 하루에 몇 그릇을 꼭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비타민 C는 그렇게 몇 그릇분량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겨우 작은 알약하나 정도만 먹어도 충분한 것입니다.

교회의 할 일중에서도 모든 것을 다 잘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실질은 그렇지 못합니다. 만약 어떤 분이 자기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일을 다 잘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교만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인간의 능력을 위주로 해보려는 일종의 인본주의 일것입니다.

교회부흥을 위해서는 전도해야 합니다. 심지어 친교도 하지말고 해야합니다. 저 자신도 교회 밥먹으러 나가는 것이 큰 부분을 차지할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친교를 하지 않아도 가슴이 천성적으로 따뜻한 사람이 교회안에 많다면 저절로 되어집니다. 혹은 예배 끝나고 근처 식당에 가서 먹으면 교회 친교실처럼 바쁘지도 않고 중요한 이야기도 할 시간과 장소가 주어집니다.

문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으로 대신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다 잘할 만큼 여러분의 능력이 대단하지 않으시다면 한가지만 하는 것이 바른 것입니다.

2. 기도는 전도하면서 생기는 진짜 기도제목을 위해 진짜로 기도한다.

가끔씩 기도를 매일 5시간씩 했다고 자랑하는 분을 만난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문제를 놓고 굉장히 몸부림치는 것이 보여 긍휼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자기 자신과 씨름을 저렇게 매일 오랜 시간 하다가 하나님과 언제 함께 일하실까 이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이불속에서 만세부르고 계신다는 생각도 강해게 들었습니다.

기도할 때 일부러 간절해 지려고 노력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경건과 같다고 착각을 일으킬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문제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전도를 하다보면 진짜 기도제목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긴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기도는 ~을 주십시오와 같은 종류의 기도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는 그냥은 잘 안된다는 것이지요. 물론 입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간절함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기도 전체의 진실성을 생각해 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거듭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다 일어난 일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감을 잡지 못했던 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시 제가 살던 마을에 임하게 해주시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복음을 듣게 해달라는 기도를 무릎꿇고 오래도록 했습니다. 여러분들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 기도가 잘못되었습까? 나 자신에 대한 기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이 때 하나님은 그런 기도보다는 청년 A와 아주머니 B를 전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A와 B라는 사람은 그 때 제가 알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만나기가 꺼려졌던 사람이고 제 마음에 이미 다른 건 몰라도 이 사람들은 진실하지 못해서 전도받을 사람이 아니라고 나름의 결론내려 놓았던 때였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살던 동네 전체가 전도되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와 제가 가장 꺼려했던 그 두 사람을 전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어는 것이 진실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어느 것이 이제 처음 믿은 자가 드리는 기도로서 교만한 기도라고 보십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그 때 그렇게 꺼려했던 B아주머니는 놀랍게도 지금은 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세상 근심을 모두 자신이 담당한 것처럼 늘 부정적인 말만 하던 분이, 하나님께서 터치하심으로, 그 동일한 그 분의 성격이 이제는 불신자가 어떻게 하면 피흘리신 예수님을 알게 될까 늘 근심하는 그런 곳에 쓰이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몇 시간씩 전화해서 어떻게 복음전해야 하는지 이럴때는 어떻게 하고 저럴때는 어떻게 하는지를 묻고는 합니다.

전도를 하다보면 하나님 나라를 구할 간절한 기도제목이 저절로 주어집니다. 전도를 하려고 하다보면 내가 복음을 얼마만큼 깨달았는지 금방 드러납니다. 또 불신자와 단 몇 분의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대화끝에 획 돌아서는 자신을 보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참으시는 것과 그 긍휼함을 사모하게 됩니다. 아무리 전해도 콧방귀도 뀌지 않는 자를 보며 성경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마음이 집을 다섯번이나 나가 나중에는 남의 애까지 잉태한 아내를 찾으러 나가는 자와 같다고 하신 그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저절로 깨달아집니다. 내 입이 너무나 어눌하고 세상의 불신자들은 마치 텔레비젼 아나운서와 같이 논리정연하게 나에게 반박하는 것을 볼때 하나님! 나에게 이 사람의 모든 말을 뛰어 넘어 마음을 돌려세울 능력을 사무치게 원하게 됩니다. 혼자 전도하는 것이 너무 힘이 들면 내가 기댈 참 전도자를 보내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간절한 기도가 됨과 동시에 놀랍게도 그것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정확하게 구하는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르시면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에 비해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이 저절로 깨달아집니다. 원래는 목사님이 전도를 제일 잘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이지요. 현실은 이 순서가 전도를 가장 두려워 하는 순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마치 일반인이 노래하다 틀리면 아무 실수도 안되지만 가수가 무대에서 노래가 틀리면, 혹은 틀릴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 큰 창피를 당하는 것 때문일것입니다.

이것이 거꾸로 직분자들을 전도하지 못하게 묵어놓은 족쇄가 됩니다. 이러한 우리 사람의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단은 얼마나 영악한 자입니까? 하지만 그런 마음을 버립시다. 그것이 참된 의미의 교만을 내려놓는 길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종류의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120% 응답하신 다는 것입니다. 왜 120%라고 썼냐하면 100%응답되는 것은 당연히 받게 되는 것이고 또 언제나 내가 기도한 것보다 더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잘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 여기에 대해 많이 언급하셨음을 아실 것입니다.

3. 하나님 이름으로 모여 1시간 말하면 예수님이라는 단어를 50번이상 이야기 하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주일 설교가 될 수도 있고, 성경공부가 될 수도 있고, 전도현장이 될 수 도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위주로 쓰여져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신약 성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구약성경 처음부터 끝까지를 의미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5 : 39)

참고: 구약성경에 수없이 기록된 예수님을 아는 것은 성경의 깊은 것을 깨닫는 데 아주 중요하다. 많은 분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저절로 깨닫는다. 마치 신약성경의 예수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 나도 정말 많은 부분을 이렇게 깨달았다. 시중에 잘 찾아보면 굉장히 많은 숨은 기록들이 있다. 놀라운 건 이런 책들은 전혀 베스트 셀러가 아니다. 어쨌든 내가 읽어본 책중 다음의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아래에 나오는 레위기(성경 ...) 설교를 봅시다.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이 지으라고 명하신 일종의 텐트, 즉 성막은 바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과정을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보여주는 과정입니다. 성막을 처음 들어갈 때 바로 보여지는 죽임당하는 짐승 혹은 번제단에서 태워지는 짐승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나의 죄를 짊어지고 나 대신 죽으신 하나님, 즉 그 예수님말입니다. 레위기(성경...) 본문에 나온 데로 나를 위해 죽임당한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물두멍에 손을 씻는다 즉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가는 첫 단계입니다. 다음에 떡이 나옵니다. 그 떡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육체의 떡만으로 살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너희가 떼는 떡은 내 살이라고 하셨습니다. .........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이 무서운 성막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 찟어진 성막은 바로 예수님의 육체를 말합니다. 그 찢어진 육체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지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6)

은혜는 예수님의 이름이 몇번 나오느냐와 정비례합니다. 만약 1시간을 이야기 하는데 한번도 예수님을 말하지 않거나 끝머리에 마치 장식품처럼 형식적으로 말한다면 당신의 직분이 무엇이건 예수님의 피를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사람의 속성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배우자나 혹은 부모가 수십년을 말해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런 강퍅한 죄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변화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복음의 진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며 교만을 넘어서 소경이 소경을 이끌게 되는 명백한 죄악이다. 왜냐하면 두 소경이 모두 죽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 이름을 50번 이상 말할 수 없는 이야기라면 하나님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는 하지 마라. 거실에서 TV보며 얼마든지 자유롭게 혹은 직장에서 부하직원을 모아놓고 얼마든지 나누어도 된다. 단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이 선포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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